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민주주의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안태환(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2019년 10월, 11월,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격동하고 있다. 중요한 정치 행위자는 가난하고 평범한 대중이다. 이들은 상황이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꿈이 강함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 폭력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의 이런 힘이 과연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격동하는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문학, 사회과학 대학원 수업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단어가 바로 “정체성”이다. 이는 라틴아메리카가 무슨 고귀한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식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라 근대성, 자본주의 세계체제와의 관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라틴아메리카는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유럽에 종속된 이래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항상 종속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민주주의의 핵심어로 인식해왔다. 그러므로 1980년대 초반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를 시장전체주의로 인식하기 전에 먼저 과거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으로 인식했다. 그만큼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유럽(미국 포함)과의 사회관계(권력 관계)를 항상 고민한다. 즉, 평등성과 해방에 대한 열망이 크다. 다른 말로 ‘폭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다. 그러므로 국가적 파시즘이 횡행하던 70-80년대에도 저항이 강했고 80년대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파시즘에도 대중이 강력하게 저항한다. 우리와 달리 파시즘이 상당히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유럽에서 생산된 사회과학 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 데 소우사 산토스에 의하면,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해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사회적 해방의 수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아마도 좌파 마르크스주의의 해법보다는 벤야민의 개념이 더 유용할 것 같다. 벤야민에 따르면, 혁명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급히 정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혁명과 개혁에 대한 기존의 개념들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리고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모순도 극도로 커졌다. 왜냐하면 비판이론 대부분이 유럽 중심부 즉, ‘북’에서 만들어졌는데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실천은 ‘남’에서 이루어지고, 새로운 행위자들(원주민, 대중 등)이 출현하고 있어 결국 사회적 해방의 개념을 다시 설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한 탈식민성 담론은 영미권에서 생산된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는 의미와 맥락이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가 이를 혼동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인데 사회적으로는 파시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좌파 정부가 집권해 국가 수준에서 변혁적인 정책을 추진해도 사회가 움직이지 않으면 진보적인 변혁이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거의 매일 여러 명의 가난한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데도 우리가 무관심한 것은 분명히 ‘사회’ 자체가 너무나 폭력적으로 파시즘화되었기 때문이다.

학문 생산도 유럽과 미국의 주류 학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를 그들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학자들 중에도 우리가 잘못하면 ‘중남미처럼’ 된다고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오마이 뉴스>에 실린 서울대 박상인 교수의 칼럼 참조),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라틴아메리카 현대 정치의 분기점

주류적 시각에서는 우파든 좌파든 일직선적인 진보(성장)를 상정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시각에서 역사는 결코 일직선적이지 않고, 어느 결정적인 매듭마다 전환 또는 퇴보적인 분기의 순간을 맞게 된다고 믿는다. 최근의 라틴아메리카 사태는 또 하나의 분기점을 보여준다.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므로 라틴아메리카 연구에서는 ‘일직선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근대성)의 범주 안에서의 비판이 아니라 그것을 과감하게 횡단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현대 정치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1980년대 초반이다. 주류 이론가들은 이 당시를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평가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1982년에 멕시코에서 외채위기가 발생하자 IMF의 구제조치가 내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린다. 물론 이런 위기에 대한 대안은 다시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 말에 아르헨티나에서 등장한 메넴의 정책이다. 그 후의 결과에 관해서는 우리도 잘 안다. 진보적인 사회학자들은 1980년대를 새로운 대중운동이 출현해 대중을 ‘배제’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투쟁하고 조직화를 시작한 시기로 인식한다. 1980년대가 잃어버린 시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하고 역동적인 시기라는 것이다. 1980년대 대중운동의 투쟁방식과 조직화의 성격은 매우 다양하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는 ‘촛불혁명’을 겪었지만, 대중의 조직화가 아직 미약하다. 이는,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거 필자가 어렸던 시절에는 가난하더라도 서로 교감하고 정을 나누던 동네가 있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군부독재를 통한 전초전이 있었다. 독재의 가장 큰 이유는 노동자, 농민 대중의 부상을 두려워하던 최상층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부 독재 세력은 갑자기 그 전에 작동하던 대내 지향형 사회경제적 구조를 대외 개방형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외채가 증가하고 경제 성장이 멈추었다. 이런 경제 위기의 대안으로 1980년대 초반에 세계은행 등에 의해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입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중이 출현’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정치지형의 표면적 변화(예를 들어, 좌, 우파의 권력 교체 등)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초반의 분기점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1970년대의 그것과 매우 달라졌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반혁명이 라틴아메리카의 사회경제구조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는 총량으로 약 5% 정도, 일인당 소득 기준으로 2.5%의, 역사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높은 경제성장률을 경험했다 ….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널리 퍼진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위 말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실천된다. … 그런 정책들이 약 25년 동안 집행된 뒤에 전통적 농업의 전자본주의적인 사회와 경제 형태가 근대적인 자본주의 체제로 변혁되었다. 주요한 특징은 도시화다. 그러나 주류 이론가들이 흔히 해석하는 모델 즉, 현대의 자본주의 공업화에 의해 농촌 인구가 도시로 흡수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행상을 하는 거대한 하위 계급 또는 반 프롤레타리아가 성장했다. 이들을 비공식 노동자로 부른다. 예를 들어, 2008년 CEPAL의 통계에 의하면 공식 노동자(공장, 사무실, 광산)는 도시 21%, 농촌 10%인데 비해, 비공식 노동자(길거리 행상, 농지 품팔이)는 도시 49%, 농촌 35%였다. 그리고 도시의 “슬럼화”가 나타났다(벨트마이어 & 페트라스 2012, 177-183, 강조는 필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30-60년대까지 소위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에 따라 우리나라처럼 수출을 위해 대규모 저임 노동력이 필요해서 농촌으로부터 사람들이 이주한 것이 아니라, 내수용 공업이 발전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 특히 6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당시는 케네디가 ‘진보를 위한 동맹’을 내세워, 라틴아메리카의 도시 인프라 건설에 미국이 원조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부터 내수용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다. 농촌의 가난한 이들이 도시로 집단 이주했는데, 이들은 농촌의 공동체적 문화에 젖어 있었다. 대학생, 언론인 등 개인주의 문화에 젖은 도시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에 공감한 사람이 바로 소위 ‘포퓰리즘’ 정책을 실행한 페론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회적 차별을 상징화하고 전달하는 제도와 기관을 공격했다. 그들의 주요 목표물은 카페, 바, 엘리트의 클럽이었고, 그들은 반 페론주의 신문사에 돌을 던졌는데, 학생들도 그들의 항의 대상이었다. 특히 유복한 계급의 자식인 학생들에게 조롱조의 농담을 던졌다(De la Torre 1992, 411).

페론 체제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집단 이주한 이들은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도시로 이주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비공식 노동자, 즉 도시의 극빈층 행상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새로운’ 대중의 연대

198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공동체적 문화에 기반한 집단적 연대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우선 안데스 지역의 오랜 원주민 문화에 뿌리를 둔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연대성 강한 ‘깊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페루의 “우유 잔 공동체”와 칠레의 “국그릇 공동체”를 들 수 있다. 벨트마이어 & 페트라스(2012, 195-196)에 의하면, 페루의 경우 1979년에 가난한 여성 50여 명의 협동조합으로 ‘대중 급식소’가 시작되어, 1982년에는 그런 조직이 1,500개가 되었다. 그리고 6,500개의 우유 잔 공동체가 구성되었다. 칠레는 1970년대 초반부터 이같은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1982년에는 산티아고에 34개의 국그릇공동체가 구성되어, 1988년에는 232곳으로 늘어났다.

신나는 음악과 춤을 즐기는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신들의 독특한 투쟁과 연대적 삶의 방식, ‘공동의 기억’에 대해 ‘집단적인’ 음악과 춤을 통해, 즉 몸으로 공유한다. 논리나 이성이 아닌 몸으로 하는 기억은 오래 간다. 다시 말해, 대중의 정치적 행동과 문화적·정서적 공감성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소수 엘리트 그룹이 아닌 일반 대중은 유럽 중심적· 개인주의적 시민성의 정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주의적 시민성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소수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적·공동체적 연대와 저항의 정신, 인민주권의 이상을 가지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기억의 정치’를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에 아르헨티나에서 전개된 대량 실업 과정은 격렬하였다. 한번 몰락한 중간계급은 이전의 경제적 지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가난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가난한 대중의 연대적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개인주의적 문화의 점진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Svampa 2002, 58). 그로 인해 지식과 능력이 다양하고, 삶의 방식이 서로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로 구성된 중간계급과 가난한 대중이 ‘실업’이라는 동질적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과 대중 사이에 연대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Almeyra 2005, 66).

또 다른 사례로 베네수엘라의 경우를 보자. 우선, ‘차비스모(Chavismo: 차베스주의)’가 등장한 해는 1998년이 아니라 1992년이었다. 이 당시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의 대중은 완벽하게 ‘하나’였다. 확실히 영토를 구축했고, 차베스는 막강한 이데올로그였다. 차베스는 대중을 변혁의 주체로 내세웠다(1998-2006). 그러나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면서 오히려 정치 지형이 꼬이기 시작했다. 무식하고 거친 대중이 중심이 되는 조합 운동에서 아방가르드적 국가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면서 국영 대기업과 통합 여당(PUSV)이 중심이 되었다(2007-2010).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술주정꾼이 ‘마르크스주의적’ 붉은 옷을 입은 엘리트 관료로 변해 나타났다. 차베스의 원래 수사와는 달랐다. 이때부터 서서히 선거에서 차베스 진영이 패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베스는 사실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는 ‘새로운 대중 주체’를 강조했다(2010-2012). 그러나 이미 차비스모 위에 국가가 군림하고 있었고, 야당의 부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대중 주체라고 하지만 포섭(순치된 차비스모)/배제(야만적 차비스모)의 이분법이 작동되면서 배제된 대중(코무나스 등)의 위축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차베스와 마두로 정부는 항상 “대중 주체의 권력화가 차비스모다”라는 얘기를 수없이 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현실적으로 미흡했다. 대중 주체를 상징하는 것은 코무나스(공동체 조합)였다. 각 코무나스의 구성원은 대략 10명 정도다. 주로 쌀농사 등을 하는 소농인조합이다. 그런데, 정부가 쌀 가공을 하는 어느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려고 했을 때, 그 기업이 코무나스의 쌀을 구입하는 대신 가격이 싼 외국산 쌀을 수입하려고 해서 코무나스 구성원들이 이에 항의하자, 정부가 그 구성원들을 체포하고 구금했다(Vaz 2019, 1). 차비스모가 중요한 기표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대중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관료주의에 의해 차비스모가 “헤게모니의 등가적 연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Ali Lopez 2017, 86-88).

끝으로, 민주주의를 얘기할수록 민주주의가 사라지는 역설을 인식해야 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보아벤투라 데 소우사 산토스는 약 천 년 전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만남을 비판한다. 그는 이 만남이 근대(현대) 문명을 목적론적·종말론적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눈에 안 보이는 아랫부분부터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재를 두텁게 하기”다. 이제는 지구의 생태 위기로 인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안태환(2015),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집단적 주체의 출현: 대중의 ‘영토성’과 바로크적 에토 스」, 『이베로아메리카연구』, 제 26권 2호(2015),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 구소. pp. 57-93.

헨리 벨트마이어 & 제임스 페트라스(2012),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역,「라틴아메리카의 사회구조와 변화」, in 잰 니퍼스 블랙(편저),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전망』, 이담북 스, pp. 177-206.

Ali Lopez, Ociel(2017), “El Chavismo Esbozo de un Sujeto Politico“, in Iraida Vargas, et.al., Chavismo, Buenos Aires: CLACSO, pp. 79-89.

Almeyra, Guillermo(2005), “Los movimientos sociales en Argentina, 1990-2005”, Argumentos, no. 49, Universidad Autónoma Metropolitana Unidad Xochimilco, pp. 43-68.

De la Torre, Carlos(1992), “The Ambiguous Meanings of Latin American Populisms”, Social Research, vo. 59, no. 2, pp. 385-414.

Vaz, Ricardo(2019), “Venezuela: Popular Movements secure release of detained communards”, http://venezuelanalysis.com/print/14441, pp.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