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사회적 파시즘”에 대해

안태환 박사(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포르투갈의 사회학 교수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유럽중심주의” 비판 담론에 대해 잘 알 것이다.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면서 자본주의에 근거한 근대세계체제가 열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달은 18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주도하에 산업혁명이 성공하고 프랑스에서 계몽주의가 발달하면서부터였다. 특히 19세기에 자본주의는 아주 크게 발전한다. 이를 주도한 나라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서부의 유럽 즉 서구이고 여기에 독일 이탈리아가 합류한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미국이 대표주자가 되고 여기에 일본도 합류했다. 이들이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소위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 클럽이다. 이에 비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부유럽으로 오래 동안 비주류였고 슬라브족이 많이 사는 동부 유럽도 비주류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근대성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잘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럽의 근대성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하나는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한 근대성이 있었지만 18세기 이래 영국 등이 또 다른 근대성을 주도하며 ‘근대성의 가능성이 자본주의의 가능성으로 축소되면서’ 근대 세계체제의 판이 바뀌었다.[i] 전자는 간단히 얘기해서 공동체적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가 승리하면서 근대성과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결합하여 자본주의를 견인하는 흐름이 헤게모니를 잡으며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산투스 교수에 의하면 근대성이 자본주의에 의해 축소되었다는 의미는 근대성의 핵심 기둥인 사회적 규제와 사회적 해방 중에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여 질식시켰다는 의미다

19세기 중반 이후, 근대성이 자본주의에 유리한 것으로만 축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 이것은 결국, 사회적 규제에 의해 사회적 해방의 잡아먹힘으로 이끌어졌다 […]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즉, 사회적 규제와 해방의 이중 위기로 이어졌다. 왜냐하면 둘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부양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는 정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ii]

이를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동양의 지혜인 ‘중용’의 덕이다. 사회적 해방과 규제 사이에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성이 오직 자본주의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19세기 중반부터 치달은 결과 오늘날 우리 모두는 아주 커다란 위기—기후위기로 인한 지구자체의 멸종위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지난 역사의 이야기를 가정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에 어떤 균형을 중시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한 근대성이 영국과 독일, 미국 등의 앵글로 색슨 형 근대성에 의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다. 또한 세계체제가 이런 막다른 골목의 상황에 처한 오늘날 진보진영 전체는 그동안의 관행에 대해 스톱하고 무언가 성찰해야 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

안젤루스 노부스로 불리는 클레의 그림은 어떤 천사가 고정적으로 주시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뒤로 막 물러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눈은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의 입은 벌어져있고,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이것은 역사의 천사를 어떻게 그린 것이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있다.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지하는 곳에서 그는 하나의 파국을 보고 있다. 잔해 위에 잔해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그의 발 앞에 내던져져 있다. 그 천사는 그대로 있고 싶어 하고 죽은 사람도 깨우고 싶어 하고 파괴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폭풍이 천국으로부터 불어온다. 너무나 바람이 거세서 천사는 이미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폭풍은 그를 저항할 수 없게 미래 쪽으로 불어 간다. 그의 등 쪽으로. 반면 그의 앞의 잔해더미는 하늘을 찌른다. 이 폭풍이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iii]

역사의 천사는 무능력하게, 자신의 발아래의 잔해 더미를 바라보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그는 재난과 남아 있고 싶어 한다.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자들을 소환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그의 등 쪽으로 미래를 향해 강하게 부는 힘에 의해 빼앗겼다. 무언가 실패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대처,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도입된다. 신자유주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민영화, 기업의 구조조정과 함께 사회경제적 양극화다. 한 마디로 불평등이 심화된다. 단순한 불평등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는 ‘배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창의적으로 “신자유주의 파시즘” 또는 “사회적 파시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안타깝게도 이 단어가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새로운 파시즘이다. 파시즘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과거 1930년대에 등장한 히틀러의 파시즘으로 국가 파시즘이다. 유태인 집단 학살을 통해 파시즘의 야만성, 폭력성이 우리에게 뚜렷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가 파시즘의 주체가 된 것과 달리 사회적 파시즘은 얼핏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가 주체로서 간접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파시즘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우선 이 파시즘을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는 판만 깔아주고 주 행위자인 사회자체가 폭력적으로 이분법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하다. 사회를 심연적으로 두 조각내서 분리시키면 된다. 예를 들어, 우선 도시 자체가 분리된다.

첫째는 사회적 분리의 파시즘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도시를 야만 지대와 문명 지대로 분리하는 것을 통해 배제된 자들의 사회적 분리를 의미한다. 야만 지대는 토마스 홉스의 자연 상태의 지대를 말한다. 문명 지대는 사회적 계약의 지대이다. 이들은 야만 지대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문명 지대는 요새화된 신 봉건적 성채로 자신들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도시적 분리의 새로운 형식의 특징이다. —사적 도시, 봉쇄된 콘도, 문이 폐쇄된 공동체. 도시의 이런 분리는 전 세계에 걸쳐 있다.[iv]

핵심 키워드는 ‘분리’ 또는 ‘구별’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근대 역사에서 ‘문명과 야만’ 사이의 근대성의 심연적 분리 또는 글로벌 라인의 분리는 16세기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

정말로 관습적인 법적 지혜와 반대로, 근대 법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특히 선의 이쪽에서 구대륙에 근대 국제법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구대륙과 신대륙을 분리하는 글로벌한 법적 선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근대적 글로벌 라인은 아마도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다(1494).[v]

우리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라틴아메리카의 16세기를 주목해야 함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의 정치지형은 사회의 국내적 분리 또는 진영대결이 아주 심각함을 드러낸다. 국내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 또한 미국과 서구의 관점에 적극 호응하여 세계를 분리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희망만이 아니라 서구 중심의 글로벌 라인의 재조정이 우리를 원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현재 세계의 <글로벌 사우스>(특히 라틴아메리카)에 속하는 많은 국가들이 이런 분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사회적 파시즘”은 오늘날 산투스의 창의적인 현실 해석의 단어이다.[vi] 사회적 파시즘의 첫 번째 특징은 “사회적 분리”(소셜 아파르타이드)에 있다.[vii] 그 좋은 사례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미국의 아프리카계 후손 등 인종적 구분이 그들과 달라 극단적 사회적 분리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세력은 조심해야 한다. 저들과의 싸움에 과감해야 한다. 신중한 전략 운운하는 순간 저들에게 패배한다. 왜냐하면 신중함 뒤에 시민의 욕망이 숨어있고 아직 사회적 분리의 기운은 초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칫 방임하면 사회적 분리가 심화되어 부작용이 아주 클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계약적 파시즘”이다.[viii] 노동조건의 악화를 의미한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이 특별법으로서 우선되지 않고 사용자와 노동자사이에 일반적인 민법상 계약관계를 우선하면서 노동자의 기본적 생존권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조의 파업이 일으킨 사용자의 손해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가 일상화되어 심각한 경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반면, 볼리비아에서는 2000년에 물을 민영화하면서 민영회사인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벡텔)이 물 가격을 대폭 올려 계약적으로 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야만은 물을 통제하는 회사처럼 최강자의 권력이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할 때이다. “만일 네가 돈을 못 내면 나는 서비스를 끊는다. 물을 주지 않을 것이고 너는 죽을 것이다.”기업가와 노동자사이에 노동 계약만 있고 노동자를 보호할 노동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야만적 상황이다. 나는 이 상황을 “사회적 파시즘‘이라고 부른다.[ix]

우리 사회는 이미 상당부분 이 형식의 파시즘이 진행되어왔다.[x] 특히 원청 기업은 기만적으로 계약상 하청기업과 노동자의 계약문제로 돌리면서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하청 노동자들이 다양한 사고로 죽고 있는데도. 노동법이 잘못 만들어졌기 때문이다.[xi] 사회 전반의 노조혐오 또는 노조의 악마화가 심하다. 그러나 노조의 악마화보다 더 염려되는 것은 정당사이의 권력관계의 불평등의 심화이다. 그러므로 노란 봉투 법, 중대재해 처벌법, 선거제도 개혁과 내년 총선이 중요하다.

이 새로운 파시즘은 매우 소프트하고 유연하여 소위 자유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 정치적 설득력도 매우 강하다. 과거의 히틀러식의 파시즘과 아예 다르다. 사회적 배제의 진행이 교묘하여 그 위장에 속기 쉽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이미 진부한 용어가 되어버렸지만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산투스가 2002년에 출판한 책의 제목이 바로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이다. 다시 말해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민의를 재현 또는 대표하지 못하므로’ 시민들이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예산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하는 운동이 중요하다. 그 선구적인 ‘참여예산제’의 실제 사례를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 에서 보여준 바 있다. 이 참여예산제는 다른 말로 ‘재분배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문제인 것은 사회 경제적 배제를 가속시키며 주민의 대부분을 소외시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헤게모니적 과정은 공동체적 혁신과 대중운동에 의해 저항받고 있다. […] 구체적으로 이들에 의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반헤게모니적 세계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  이 운동은 공산당선언이 상징하는 주류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사회적 변혁 모델의 붕괴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데 매우 다양한 토픽들을 건드리고 있다. 그중에서 1989년부터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서 시작된 참여 예산 제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 브라질은 권위주의 전통이 매우 오랜 나라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왔거나 대중이 극소수 리더에 의한 포퓰리즘과 연고주의에 포섭되는 전통도 강하다. 여기에 자유주의가 가세하면서 정치의 “자의성”이 강해졌다. 한마디로 사회에 대해 국가가 너무 강했고 경제,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했다. […] 그러나 1988년부터 시민성의 권리가 강조되고 지방분권화가 강력히 추진되면서 로컬 권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좌파에 의해 지방정부에서 대중 참여의 혁신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에 기초한 PT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상파울루, 포르투 알레그레, 산투스, 벨로 오리손테, 깜삐나스, 비토리아 등의 주요 도시의 지방선거에서 확실하게 승리했다. 이는 좌파 정당에 대한 주민 대중의 지지가 확고했음을 보여준다. 포르투 알레그레시의 성공이 눈부신데 철저하게 민주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도적으로 민주적 혁신을 위해 국제 세미나를 적극 개최했다. 특히 우루과이 등 메르코수르의 기여가 컸다. 여론조사와 언론의 기여도 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 행정에서 “대중행정”을 들고 나온 것이다. 시 예산의 기획과정에의 대중 참여를 제도화했다. 즉 참여예산제가 태어났다.[xii]

세 번째 특징은 “영토적 파시즘”인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진다.[xiii] 네 번째 특징은 “불안의 파시즘”이다.[xiv] 우리 사회는 만성적 불안에 잠겨 있고 이를 이용하여 보험의 민영화 등이 심각하다. 특히 서비스 산업 노동자, 플랫폼 종사 노동자(예를 들어, 택배, 배달 노동자) 등 불안한 지위의 노동자가 많고 이태원 사건 등 정부의 무책임도 거론하기 싫을 정도로 심하다. 다섯 번째는 “금융적 파시즘”인데[xv] 이것은 부동산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데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부문이다. 자칫하면 경제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특징과 네 번째, 다섯 번째 특징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가 주도하는 소비주의에 의해 대중을 유혹하는 것이 심각하다. 왜냐하면 소비주의에 대해서는 중산층과 서민 대중, 젊은 층과 나이 든 세대, 여성과 남성 등 젠더 차별 외에 정치 경제와 문화(특히 한류의 세계적 히트)가 서로 얽히는 등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대안 마련이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층을 중심으로 뉴미디어[xvi]를 통한 먹방과 해외여행 중독이 심각하다. 더군다나 이런 경제 사회적 차이를 일부 정치권이 민감하게 이용하여 갈라치기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하고 있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칫하면 우리는 급진적 대안과 이의 성급한 실천의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산투스는 이럴수록 “품위 있는 삶을 위해 신중한 지식”(Santos 2014, 163)을 제안하고 있어 앞에서 언급한 동양의 지혜인 중용의 덕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 상호 문화적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i] Santos, Boaventura De Souza (2014), Epistemologies of the South, London & New York, Routledge.

[i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37-139.

[ii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74-75.

[iv]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8.

[v]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0-121.

[v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8-133.

[vi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8.

[vii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9.

[ix] 산투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2022),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 안태환 옮김, 갈무리, 52쪽.

[x] 노조의 파업에 대한 손배 청구와 같은 경우.

[xi] 예를 들어, 건설 일용직 하청노동자들의 추락사 등.

[xii] Santos, Boaventura De Souza (2004), Democratizar la democracia, Mexico, Cfe, 391-395.

[xiii]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29.

[xiv]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30.

[xv] Epistemologies of the South, 130.

[xvi] 예를 들어, 유튜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