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독립이 진행 중인 페루

프란시스꼬 바스께스 까리요 교수 (페루 산 뻬드로 데 침보떼 대학)
Francisco Vásquez Carrillo(San Pedro de Chimbote)

박호진 교수 번역(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1821년 7월 28일 페루 독립선언은 339명의 스페인인과 끄리오요(criollo: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역주)에 의해 서명되었다. 새로운 페루 공화국은 당시의 백작들, 시장들, 시의회 의원들, 대주교들과 가톨릭 주임사제들의 연대에서 탄생했으며 호세 데 산 마르띤 장군이 이끌었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인들, 또는 끄리오요(criollo)들이 그 마무리를 한 것이다.

독립선언은 대중의 참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원주민은 독립선언에서 배제되었다. 잉카 사회의 복원을 꾀했던 원주민의 기도(企圖)는 실패했고 이는 스페인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원주민 반란이 주춤해지면서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즉 끄리오요(criollo)의 지배력은 공고해졌다. 끄리오요에게 있어 독립과 분리를 위한 투쟁은 새로운 동인이 되어 새로운 국가계획을 수립하게 하였다. 원주민의 식민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은 끄리오요의 국가 수립 계획에 의해 희석되었다, 따라서, 산 마르띤 장군의 페루 진공은 스페인인과 끄리오요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산 마르띤이 제안한 입헌군주제는 시몬 볼리바르가 구현한 공화주의적 이상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그의 이상은 그가 종신 독재체제를 수립하려 할 때 그 의도가 빗나가 버린 셈이다. 페루는 새로운 공화국, 즉 아르헨티나, 칠레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및 에콰도르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진격한 이 두 부대의 진원지였다. 1824년 12월 9일 아야꾸초(Ayacucho) 전투에서 패자에게 모든 종류의 편의를 제공하는 협약이 체결된다. 아야꾸초 협약은 스페인인에 대한 끄리오요의 애정과 문화적 근친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

신설 페루군은 원주민의 입대를 거부하였다. 같은 방법으로 다수의 페루 국민은 단지 5년간만 지속되었던 세금 폐지 공약으로 조롱받았다. 끄리오요와 스페인인, 혼혈인과 사제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화국이 탄생했으나 원주민과 노예는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페루 공화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영감을 준 프랑스 혁명정신을 포기하였다. 자유, 민족, 혁명, 조국, 국가, 질서, 문명의 이념들은 피부색을 전제로 한 우월성에 바탕을 둔 식민주의적 담론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인종차별주의는 제도와 사회에 안착하였고, 그렇게 시민권의 실현은 중단되었다. 인종차별주의는 의식과 사회구조에서 합법화되었고, 그것은 원주민 착취의 연속성과 토지 소유에 기반한 경제 모델의 심화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끄리오요의 권력 장악은 강단, 공립학교, 많지는 않지만, 인종차별주의적 대중 매체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설교를 강화하였다. 이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후안 히네스 데 세뿔베다 (Juan Ginés de Sepúlveda)가 영감을 준 것인데, 그는 원주민 문화가 열등하고 야만적이라는 전제에서 사상적인 지배와 굴복을 정당화했다. 식민시대에 강요된 우상숭배 근절은 공화국에서 공인되고 합법화된 인종 우월주의 담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언어, 의상, 먹거리, 노래와 춤은 원주민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심하게 불신을 받았다.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어서, 미국식 아메리칸 스타일은 선호되었다. 페루 공화국은 다수의 원주민에 등을 돌리며 존속하고 통치하는 것을 배웠다.

모든 안데스적인 것은 신성함을 상실하고 이단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거부되었다. 자유 공화국이라는 약속은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였다. 공화국은 스페인 왕관이 없는 식민지 자체였다. 공화국은 과거에도 지금 현재에도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결여된 대화와 대표성이 없는 국가였다. 국가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다수인 원주민을 토지를 보유하지 않고 문맹이라는 논리로 추방했다.

비운의 태평양 전쟁은 공화국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내었다. 아벨리노 까세레스 (Avelino Cáceres) 장군은 원주민 비정규군을 기반으로 조직해서 칠레 침공군에 대항했다. 그리고 미겔 이글레시아스 (Miguel Iglesias)는 새로운 협정서로 안꼰 (Ancón) 조약 서명을 서둘렀다.

곤살레스 쁘라다 (González Prada)는 전쟁의 패배에 대해 공화국 ‘귀족’ 계층을 힐책하고 책임을 물었다. 넬슨 만리께 (Nelson Manrique)는 독립이 중단되고 배타적으로 되었다고 단언한다. 1919년 미국의 영향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원주민 농민 계층보다 우월하고 다른 사회부문으로서 노동자 계층이 등장하였다.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APRA)>과 <사회주의 정당(Partido Socialista)>은 1968년 후안 벨라스꼬 알바라도 (Juan Velasco Alvarado) 장군과 함께 농업개혁을 이뤄냈다. 알바라도 장군은 토지 소유와 농업부문에서 사회적 노예제를 무효로 했다. 1950년대부터 리마는 안데스산맥으로부터 몰려오는 이주민들의 무대가 되었으며. 1980년에 리마는 걷잡을 수 없는 인구 폭발의 산 증거가 되었다. 리마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 중심의 도시가 아니었으며 식민지도 ‘귀족’ 공화국도 아니었다. 페루는 불모의 팜파 지역과 리마의 가파른 산악지역에 원주민이 몰려들면서 통합되고 있었다. 공화국 ‘귀족’ 계층이 받아들였던 서구문화는 차츰차츰 원주민 전통에 근간을 둔 문화에 의해 점령당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촐로(cholo:혼혈, 역주)> 문화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페루 공화국이 탄생한 지 200년이 지나서야 시골 출신의 한 교사가 대통령으로 선포되었고 이제 그는 안데스 지역 원주민은 통치할 수 없다는 끄리오요 집단에 각인된 이데올로기에 두들겨 맞고 있다. 열등한 원주민이라는 낙인은 현재는 혼란을 조장하는 “테러쟁이들(terrucos)”이라는 비난으로 변질되고 있다. 리마의 새로운 ‘귀족’ 계층은 민중의 정치적 투쟁을 “테러쟁이질 (terruquear)”로 폄하시켰는데, 이러한 폄하의 실마리는 식민시대에 물려받은 것으로 인종주의와 배제의 논리가 결합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 상황에서 민중의 의지는 과거에 평등, 자유, 형제애라는 이상과의 괴리를 보여주었던 리마의 엘리트 계층에 의해 무력화될 수도 있다.

페루 공화국은 자유 민주주의 원칙의 유효함을 증명하기 위해 대통령 당선인 비준에 대한 두려움을 멀리하고 만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진실된 사회적 대화의 과정이 될 것이다. 사회 정치적 행위 주체자들의 참여를 통해 맺은 새로운 사회 계약은 대통령 권력의 합법화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은 목하 진행 중인 역사적 도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천은 온전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는 당연하고 지속적인 기능이다. 그런데도 페루에서는 현재 끊임없는 논쟁거리이다. 사회적 만남과 대화를 통해 잔존하고 있는 정신적 식민주의로부터 독립의 실현을 위한 한 획을 그어야 할 것이다.